(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개봉 38일 만에 1천만 관객을 사로잡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힘은 뭘까.

'광해…'는 영화계 최대기업 CJ엔터테인먼트가 기획·개발한 작품으로 개봉 초기에는 CJ의 공격적인 마케팅의 영향이 컸지만, 영화에 감동을 받았다는 관객들의 자발적인 입소문이 폭발흥행 지속에 큰 몫을 했다.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은 시나리오와 각자의 몫을 충실히 소화한 배우들의 호연, 사극에 코미디와 드라마를 조화롭게 녹인 매끄러운 연출 등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또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기에 평민을 대변하는 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따뜻한 인간성과 정치의 기본을 얘기한 내용이 대중들에게 크게 호소한 측면도 크다.

◇익숙하고 재미있는 얘기로 대중성 확보 = '광해…'는 낯익은 소재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똑같은 얼굴을 가진 왕과 거지가 우연히 자리를 바꿔 역할극을 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에 흔한 이야기이다. 이 소재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할리우드는 물론 국내에서도 얼마 전에 있었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해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영화는 달라질 수 있다.

'광해…'는 무대를 조선시대로 옮기고 역사적인 해석이 분분한 왕 광해군을 허구의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데려왔다. 실제 역사에서도 변화가 심하고 극적인 삶을 살았던 광해군을 내세움으로써 대중들이 이야기에 쉽게 빨려들게 했다.

또 광해군의 자리를 대신하는 광대 '하선'(이병헌 분)을 누구보다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대중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들로 영화를 가득 채웠다.

고급스러운 생활을 꿈꿔보지도 못한 천민 하선이 갑자기 왕의 대접을 받으며 먹고 입고 싸는 것 모두에서 당황하면서도 희열을 느끼는 장면은 관객에게 일종의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한다.

또 하선이 궁에서 만난 주변 사람들과 교감하고 따뜻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관객들에게 따뜻한 휴머니즘을 느끼게 하고 하선이란 인물에 더욱 빠져들게 한다.

이때문에 하선이 궁녀 '사월이'(심은경)의 죽음에 분노하고 사월이의 어머니를 찾아주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는 모습은 많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젖게 했다.

하선이 중전에게 느끼는 순수한 사랑,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는 호위 무사를 감동시키는 장면 등은 맛깔스런 양념으로 관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이병헌 등 배우들의 힘과 조화로운 연출 = 광해와 하선의 두 인물을 번갈아 연기하는 주연 배우 이병헌을 빼놓고 이 영화를 얘기할 수는 없다.

추창민 감독은 캐스팅하는 과정에서부터 이병헌을 "내가 생각한 왕의 모습 그 자체였다"고 연합뉴스와 최근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천민이라고 해서 너무 경박해서는 안 되고 왕이 됐다고 하루아침에 무거워져서도 안 되는 '왕이 된 광대'의 모습을 이병헌은 영리하게 연기해냈다.

그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귀족적인 이미지를 왕의 얼굴, 또는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얼굴에 그대로 투영하면서도 천민 광대로서 보여야 할 장난기와 여유를 스스럼없이 보여줬기에 가능했다.

이는 배우 이병헌이 지난 20년 가까운 배우 인생에서 갈고 닦은 그만의 무기이자 실력이다.

아울러 진짜 명품이라 할 만한 조연 배우들이 안정된 연기로 이병헌을 더 빛나게 했다.

특히 하선을 데려와 왕으로 만드는 '허균' 역의 류승룡은 한 치도 흔들림 없는 연기로 영화의 중심을 잡아줬다. 제대로 된 정치를 하고 싶은 마음을 가슴 속에 숨기고 잔혹한 정치의 현실을 계산해 최선의 결론을 도출하는 냉철한 인물의 모습을 류승룡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보여줬다. 그의 튀지 않는 연기에 영화는 더 살아났다.

왕의 최측근 조내관을 연기한 배우 장광, 사랑스럽지만 비극의 주인공이 된 사월이 역의 심은경, 충성스러운 호위 무사 역의 김인권, 아픔을 지닌 중전 역의 한효주 등 배우들이 모두 제 몫을 해냈다.

그리고 이 모든 인물과 인물들의 관계를 때로는 웃기는 콩트로, 때로는 슬픈 드라마로 조화롭게 직조해낸 추창민 감독의 노련한 연출 솜씨가 '광해…'를 품격 있는 대중 상업영화로 끌어올렸다.

◇대선 정국..왕 이야기 통했다 = CJ엔터테인먼트가 시기를 노렸든, 노리지 않았든 '광해…'의 내용이 대선 정국에서 더 큰 호소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영화 속에서 왕이 된 평민 하선은 제 이익이 침해당할까 두려워 정당한 조세법인 대동법을 반대하는 벼슬아치들에게 호통을 친다.

조선시대 썩은 사대부들의 모습은 이 시대에도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유력 정치인들이 세금을 회피하려는 모습과 꼭 닮아 있다. 그런 벼슬아치들에게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많이 가진 자가 세금을 더 내는 대동법이 무슨 하자가 있느냐고 따지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 준다.

무엇보다 이런 얘기가 많이 배운 자가 할 수 있는 어려운 얘기가 아니라 천민이자 광대 출신인 하선도 똑똑히 얘기할 수 있는 상식이자 기본이라는 점이 각기 다른 사회적 배경을 지녔을 1천만 명의 대중 관객에게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못된 지방 관리를 잡아다 혼내주는 장면도 현실의 곳곳에서 부조리함을 느끼는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안겨줬다.

이런 영화 '광해…'의 흥행은 대선을 앞두고 많은 유권자들이 원하는 지도자상이 어떤 모습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이런 측면으로 인해 대선 후보들까지 이 영화의 관람 대열에 나섰고 그런 모습이 다시 영화에 대한 관심을 반복적으로 일으켜 1천만 관객까지 도달하게 됐다.

영화평론가 전찬일 씨는 '광해…'에 대해 "기가 막히게 시기를 잘 탔다"며 "대선정국에서 사람들이 차기 정권에 꿈꾸는 무엇,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을 예시했다. 가짜 왕 하선이 하는 것들은 대중이 차기 대선 주자에게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영화는 시대의 예술이자 오락이며 시대를 반영하고 시대를 일찌감치 예고한다"며 "'도둑들'이 판타지로 활력과 짜릿한 재미를 선사했다면 '광해…'는 시대성을 담보했다. '도둑들'에는 없는 그것을 갖고 있기에 '광해…'는 훌륭한 텍스트이고 미래적인 텍스트다"라고 평했다.

◇극장가 비수기 개봉..적수 없었다 = '광해…'가 할리우드 대작들과 한국영화들의 경쟁이 치열한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성수기를 피해 비수기인 9월 개봉한 것도 흥행에는 호재로 작용했다.

올해 먼저 1천만 관객을 넘은 '도둑들'만 해도 6월 말 개봉한 할리우드 흥행 시리즈 '어메이징 스파이더맨'과 7월 중순 개봉한 할리우드 대작 '다크 나이트 라이즈'와 경쟁해야 했다.

이 경쟁에서 할리우드 영화들이 예상만큼 파괴력이 강하지 않은데 비해 '도둑들'은 대중성이 컸기에 할리우드 영화들을 제압할 수 있었지만, 틈새시장이라 할 수 있는 9월에 개봉한 '광해…'는 딱히 적수가 없었다.

'광해…' 개봉 전 할리우드 인기 시리즈 '본' 시리즈의 속편 '본 레거시'가 개봉했지만 실망스럽다는 평을 받으며 일찌감치 힘을 잃었고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5편 역시 블록버스터라 하기엔 약했다.

한국영화로는 '광해…' 이후 개봉한 '간첩'이나 '점쟁이들'이 있었지만 제작비 규모에서부터 순제작비 60억 원, 총제작비 90억 원에 달하는 '광해…'와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코미디와 액션 사이에서 장르가 애매한 '간첩'이나 관객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코믹호러 장르의 '점쟁이들'은 대중성 측면에서도 '광해…'와 경쟁하기 어려웠다.

이 같은 판단으로 CJ엔터테인먼트는 애초 예정했던 9월 20일에서 1주일 앞당겨 13일 개봉, 9월 영화시장을 거의 가져가다시피 했다. 개봉일은 주연배우 이병헌의 해외 출국 일정에 맞춰 앞당긴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시장 상황에 대한 CJ 나름의 분석이 있었다.

결국 이런 영리한 전략이 '광해…'의 1천만 관객 동원과 함께 9-10월 영화 시장의 확대라는 결과까지 가져오게 됐다.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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